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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다림의 시스템

작성자
최고관리자
작성일
04-03-31 00:00
조회수
756

​다음은 2013년 5월 10일자 매일경제에 고려대 이상철 석좌교수께서 기고한 글입니다.

 

 

http://news.mk.co.kr/newsRead.php?sc=30200004&cm=%EB%B6%84%EC%84%9D%EA%B3%BC%EC%A0%84%EB%A7%9D&year=2004&no=18149

 

 

 

실로 오랜만에 미국생활을 해봤다.

어설픈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중에도 특히 익숙지 않은 것이 기다림이었다.

 

전화 가설, 케이블 TV 설치, 초고속 인터넷 설치, 휴대전화 가입 등 에 기본이 1주일이고 열흘이나 2주일이 걸리는 것은 예사다.

 

여기서 는 고객이 왕이 아니다.

 

모두가 기다려야 한다.

 

운전 면허를 따는 것도 필기시험 보는데 기다리는 것만 두 시간, 합 격하면 한 달 뒤 주행시험, 면허증 발급하는데 2주일. 그래서 정식 면허증을 받으려면 두 달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.

 

그런데도 희한한 것 은 기다리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막상 그들을 만나면 친절과 진지함 에 절로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다.

 

미국 근로자의 생산성이 한국 근로자의 두 배가 넘는다는 사실이 처 음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.

 

물론 경제학자들의 얘기를 들으면 일면 수긍이 안 가는 것은 아니지 만 좀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고민해보다가 내린 결론은 아 마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하게 처리해서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하 지 않는 습관적인 시스템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.

 

그 시스템은 글로 써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인정하고 또한 체 득하고 있는 것으로 그 시스템을 거친 결과물들은 거의 예외가 없으 며 어느 수준 이상의 품질을 보장하고 있는 것 같다.

 

그러나 이곳에도 빨리 되는 것이 있기는 하다.

 

소위 셀프 서비스. 주유소에 가서도 신용카드를 스스로 긁고 주유 호스로 기름을 넣으 면 빠르기도 하고 가격도 싸다.

 

초고속 인터넷도 배달된 초고속 모뎀 을 스스로 설치하면 설치비가 무료다.

 

그러나 서비스맨이 와서 설치하면 1주일 이상을 기다리고 또한 설치 비 80달러를 받는다.

 

여기서 분명한 것은 책임 소재다.

 

셀프이면 나 스스로 뒤에 일어나 는 일에 내가 책임져야 하지만 그들이 해주면 돈이 더 들고 시간이 더 드는 점 대신 서비스에 대한 책임도 철저히 그들이 지는 것이다.

 

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시간을 들여서 두 번 같은 일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다시 확인한 후 작업을 완료한다.

 

바로 최선의 이익은 기다림과 책임이 잘 어우러진 결과물에서 얻어진 다는 인식이 그들을 불평없이 기다리게 하고 이것이 그들의 오랜 생 활습관과 경험에서 체득된 소위 시스템으로 정착됐다는 생각이 든 다.

 

이 시스템은 모든 것에 우선하며 모두가 시스템 속에 순응한다.

 

세계 제일 갑부 빌 게이츠가 맥도널드 햄버거 집에서 줄서 기다리는 사진 이 우리나라에서는 신기하지만 미국에서는 아니다.

 

또한 교차로의 ’4 Way Stop’ 사인에서는 급한 사람, 좋은 차를 가진 사람이 먼저 지나 가지 않고 철저히 먼저 온 차량이 먼저 지나간다.

 

나보다 먼저 온 차 를 기다려 줌으로써 나의 순서도 보장받는 호혜적 질서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다.

 

가끔 시스템을 벗어나는 차들이 있으면 가던 차가 멈추고 그 차를 먼 저 가게 하는 배려를 베풀지만 쏘아보는 눈빛들이 만만치 않다.

 

우리의 경우 이러한 시스템을 넘어서는 사례가 많다.

 

특권층이 권력과 금력으로 시스템을 침범하고 집단으로 무력시위를 하면서 시스템을 넘어선다.

 

서비스 센터에서는 걸핏하면 기다리게 한 다고 큰소리로 야단을 치고 한밤의 파출소에선 취객이 경찰관에게 행 패를 부리기도 한다.

 

교차로에서는 11초의 손해를 용납하지 않으 려고 신호가 바뀐 후에도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.

 

모두를 위한 최선 의 이익보다는 나만을 위한 이익이 우선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이다.

 

1%의 기다림은 나에게 그 이상의 이익을 준다는 간단한 진리를 배워 야 한다.

 

매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서 잠자리에 들기 전 그날이 어 떤 날이었는가를 한번씩 돌이켜 보자. 하루일과중 지난번 부실하게 했던 일 때문에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 일은 없었는지, 나 혼자 급하다고 순서를 무시한 적은 없었는지, 기다리는 것이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양보를 거절한 적은 없었는지, 지난번 잘못 내린 결정을 바꾸느라고 아니면 잘못된 결정을 그대로 밀고 나가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고 고민을 했는지 곰곰 생각 해 보자. 빨리보다 어떻게 더 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.

 

그러기 위해 서는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.

 

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는 인간 사회에 꼭 필요한 남을 배려하는 아름 다움이 들어있다면 더 좋겠다.

 

내 뒤에 줄 서 있는 사람에게 내 자리를 양보해 보자. 놀라며 고마워 하는 그를 보며 10초 기다림이 백 배의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을 만끽 할 수 있을 테니까. <이상철 고려대 석좌교수>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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저도 1년간 미국에 가서 처음으로 겪었던 기다림들에 대해 느낀 바가 있었는데 이 분이 글로 잘 표현하여 주셔서 좋았습니다.

 

특히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하게 처리해서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습관적인 시스템이 미국 근로자의 생산성을 한국 근로자의 두 배가 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.

 

또한, 미국은 서비스 비용이 높은데 여기에는 사후 책임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.